요즘 봄꽃을 마주할 때마다 박경리의 시 「산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긴 시의 구절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유독 가슴에 남아 떠나지 않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청춘은 짧고 아름다웠다.” 그 문장을 되뇌다 보면, 눈앞에 피고 지는 봄꽃들 또한 조용히 속삭이는 듯합니다. 봄은, 아니 봄꽃은, 짧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현충원에는 제주도의 삼다(三多)를 닮은 세 가지 풍경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묘지와 비석이 많고,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많으며, 무엇보다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즘의 주인은 단연 철쭉입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철쭉은 마치 계절이 한순간에 타올라 절정에 이른 듯, 보는 이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수많은 꽃들 사이에서도 유독 현충원의 철쭉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화사함 속에 깃든 고요한 경건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늘 스쳐 지나기만 했던 위패봉안관에 발걸음을 들였습니다.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사했으되 끝내 돌아오지 못한 10만 4천여 용사들의 이름이 그곳에 머물러 있고, 지하에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6천 2백여 무명용사의 유골이 잠들어 있습니다. 위패 아래 놓인 빛바랜 사진들 속에는 교복을 입은 아직 앳된 얼굴들이 시간이 멈춘 듯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얼굴들을 바라보는 순간, 한때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형제였고, 사랑이었을 그 삶들이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즈음의 봄꽃은 내 청춘보다도 훨씬 짧고, 헤아릴 수 없이 더 찬란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꽃을 찾아 나섭니다. 언젠가 스러질 것을 알면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 봄을, 그 꽃들을, 그저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현충원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벚꽃이 다 지고서야 피는 겹벚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그 길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산다는 것
-박경리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경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렀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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