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카페를 21년 7월에 가입하여 지금까지 376회 방문했었네요.
그리고 어느덧 2년 10개월이 흘렀습니다.
2년 10개월간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잠시 소개를 하자면,
51년생이신 어머니께서, 췌장암 2기말 판정을 받으시고, 기적적으로 수술&항암을 하셨으나
전이 되어 있었던 암이 현재 활동하여 다시 4기 판정 받으시고, 연세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현재 항암중이십니다.
매번 카페와서 정보를 얻거나, 응원만 받다가
용기를 내어서 간증을 하고자 합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꼭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은 영적 위로를 받으시고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으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
먼저 많이 부족한 간증입니다. 간증은 저의 신앙적 성숙의 부족함, 하나님을 모르고 무지하게 살다가 고난을 주제로 씨름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간증에 들어가기 앞서 간증은 저의 신앙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시작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공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간증 가운데 지금도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시며 의지가 있으신 하나님께서 온전히 영광 받는 자리가 되길 바라면서 간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저는 모태신앙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적 당시 어머니가 구역장을 하셔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구역예배 및 신방을 따라다녔습니다. 구역예배를 마치고 나면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비빔냉면 맛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께서는 교회 꽃꽂이를 하셔서 꽃집에도 자주 갔었던 기억도 납니다. 또 가정예배를 종종 했었는데, 쪼꼬만한 녀석이 어머니와 찬양을 부르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몰랐지만, 펑펑 울면서 찬양을 부른 기억도 납니다. 그래서 제 삶에 있어 교회와 예배는 당연했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기쁨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큰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질문들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왜 수고스러울까, 세상은 왜 악할까, 나는 왜 존재하고 왜 태어났을까,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로 안다면, 세상사람 모두가 목사님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인간은 왜 죽을까, 쾌락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와 같은 생각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에 답이 있는 성경책을 펼쳐 보지도 않은 채 생각만 해댔습니다. 저는 질문의 깊이와 크기에 비례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당연히 납득할만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늬만 교인인, 필요할 때만 ‘신’을 찾아대고, 울부짖는 척을 하고, 지옥에 갈까 두려워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방패 삼아 안심하고 죄를 지었으며, 믿는 자로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정리하면 저는 모태신앙 덕분에 예배와 찬양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맛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적 행위가 습관처럼 고착화 되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어버렸고, 그 자연스러움이 마치 나의 영적인 상태도 이만하면 꽤 괜찮다라는 착각을 일으켜, 일요일 2시간 정도만 크리스 찬이 된 척하는 선데이 크리스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저의 영성은 정체되어 죽어있는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저의 영적 상태는 성경에서도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5-17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종교적’ 활동을 하는 삶을 살아가던 중 저의 인생에 큰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췌장암 판정>
21년 7월 당시 평소 지병이 있으신 어머니를 위해 건강검진을 하러 갔습니다. 검사 당일 어머니와 저는 급하게 의사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상기된 표정을 띠고 어렵게 돌려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즉슨 어머니의 췌장에 악성종양이 의심되니 빨리 큰 병원을 가보란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암'이라는 녀석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공기와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췌장암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상대적으로 어려운 암중에 속하는 암입니다. 수술을 할 수 있는 환자는 10~20%밖에 존재하지 않고, 수술을 해도 2년 이내 재발 가능성이 높은 암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암'에 대해서 지독하게 공부를 하고, 파헤칠수록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인간들이 제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오로지 하나님을 붙잡는 길 밖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눈물로 전심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에게 회복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비록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이 절망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 받으실 사건으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암 전이가 없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췌장암 환자들의 꿈인 췌장암 수술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항암제 중에 제일 독하다는 췌장암 항암을 하셨습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응급실에 간 적도 있고, 구내염으로 다 찢어진 입안에 모래알 같이 느껴지는 밥알을 억지로 잡수시는 어머니를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때론 그렇게 힘들게 먹은 밥을 다시 다 토해낸 적도 많지만, 그래도 이겨내려는 그리고 이기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며 대견했습니다. 보통 이런 마음은 부모가 자식한테 갖는 마음인데 말이죠. 부모가 나이가 들면, 자식역할 부모역할이 바뀐다는데 그 말이 맞나 봅니다.
아무튼 그때 저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동시에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저의 결혼식에 어머니가 함께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허락하셔서 어머니는 저의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그것은 꿈만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두려워 말라고, 안아주시는 영의 아버지>
하지만, 저의 인생에서 다시 큰 고난이 찾아옵니다. 21년 7월 대학병원에서 전이가 되지 않았다고 했던 판정이 뒤바뀌었습니다. 당시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암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녀석은 21년 7월부터 이미 폐 속에 자리 잡아 조용히 움트고 있었고, 2년 8개월간 조금씩 자라나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다시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단받은 날 억장이 무너지고, 퇴근하는 차 안에서 눈물이 흘러 앞을 가렸습니다. 와이퍼는 창문이 아니라, 제 눈을 닦아줘야 할 판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세상이.. 하늘이.. 무너져 버렸고 이 고난은 저를 저 지하 깊은 곳까지 데려갔습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상황에 맞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매 순간 했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금 펼쳐졌습니다. 이 고난은 표면적으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영육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버스 창밖을 보다가, 지하철에 서있다가, 길가다가 어느 공간 가릴 것 없이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참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두려움의 정체를 알기 위해 두려움을 마주하고 조명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이별과 헤어짐을 동반한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죽음'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고난이 두려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지 않나? 왜 내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할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진정 무엇일까..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런 생각이 인간의 인생까지 확장되어, 인간의 운명을 마주하게 되었고, 인간의 운명 앞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의 삶은 이렇게 고달프고 안쓰럽고 처량하구나.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죽음 가운데서 우리 인간들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구나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면 울부짖고 싶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 울면서 태어나나 봅니다.
그리고 고난가운데 절망하는 또 다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저는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전심으로 믿은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고, 진정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있구나 말이죠.. 저는 영적으로 영의 성장을 하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울고만 있는 그런 영혼이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귀로만 듣고 머리로만 이해한 수준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채로 경건의 능력을 믿지 못한 채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했던 허깨비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두려움을 추스르지 못한 채 현실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성경앱을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저는 이 말씀이 놀라웠습니다. 이 말씀은 너에게는 두려울 선택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두려울 권리가 없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어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울 이유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렵지 않은 이유는 네가 네 열심으로 나를 알고자 했던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으로, 또 내가 절실하게 부르짖거나 나의 신음과 눈물에도 나와 아주 가까이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너와 함께 할 것이며 그 지존자는 너의 지존자이다. 그 하나님이 친히 너를 굳세게 해 주겠다. 그리고 너를 도와주겠다. 너의 인생을 내가 강권적으로 붙들어 잡아주겠다. 그러니 너는 나를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1장 31절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명기 말씀처럼. 광대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닌 친밀한 나의 영의 아버지로 저의 모든 힘듦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내가 안길 수 있구나, 그분의 품에 내가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린아이가 혼자서 열심히 걷고 뛰다가 이제는 도저히 못 가겠어서 자기 부모를 찾는 것처럼, 저도 부모를 찾듯이 하나님을 찾았고, 영의 아버지께 안아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나님 품 안에 정말 안긴 것 같이, 하나님으로 부터 깊은 위로를 받았고, 제 안에 두려움은 조금씩 잠잠해졌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연결해서, 네 몸처럼 슬퍼하시는 하나님>
저는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어머니'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마치 네 몸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부모와 자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유대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강력한 '유대관계'의 기초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특별히 부모와 자식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사랑을 기초로 그 위에서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또 다른 나의 자아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관계가 가족이 아닌 완벽한 타인에게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슴속에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년 8개월간 아산병원이란 큰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병실/병동에서, 병원 복도를 지나가다, 항암을 대기하다, 약을 타기 위해 기다리다가, 피를 뽑고 지혈하는 과정에서도, 병원 곳곳에서 많은 중증환자들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폐암 4기 선고를 받고 퇴원하는 60대 부부, 원인 모를 질병가운데 밤마다 신음하는 20대 여자아이, 뼈만 남아 초점을 잃고 휠체어에 몸을 실은 여자, 보호자도 없고 귀도 어두운데 폐렴 진단을 받은 80대 할머니 등, 생사의 경계선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라도, 제 마음속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져서 그들을 위해 부족하지만 작게나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슬픔도 함께 슬퍼하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질병가운데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실 텐데, 하나님은 도대체 얼마나 큰 슬픔의 스케일을 가지고 계신 걸까, 그 슬픔이 너무나 크고 깊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슬픔이다.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향한 슬픔과 사랑을 알게 되면서 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껏해야 나의 가족에 대한 범위 안에서 사랑을 했지만, 하나님은 나의 슬픔뿐만 아니라 사랑을 기초로 연결된 세상 만물의 모든 존재들을 향해 진정 함께 슬퍼하시고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강함 되는 이유>
그리고 저는 고난의 사건 가운데 혹시나 내가 놓친 것이 있는지 계속해서 복기하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믿음은 지독하고 뼈저리게 기복신앙이었던 것을요... 2년 8개월 전 어머니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의연한 척 어디서 주어 들은 건 있어서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기도했는데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실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길 바라는 나의 일방적인 뜻이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머니를 회복시켜주지 않으면 안 될 것 마냥, 눈물과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기복신앙적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췌장암 수술을 하시고, 아무 재발 없이 항암을 10차까지 하셨다. 심지어 결혼식도 보셨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 "역시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를 보호하시고, 암도 깨끗하게 없애주시고, 역시 우리 믿는 자들을 안위하시고, 질병 치유의 역사를 이루신다."라고 고백해 버리고, 이 사건이 귀결된다면 이것만으로 고난이 주는 깨달음과 그 가운데 발생된 믿음은 올바른 것일까?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닿는 자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즉, 이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닌 한쪽으로만 취우신 왜곡된 신앙심이었습니다. 결국 아직도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내가 만든 하나님께 나의 소원을 빌어달라고 기도하는 무속인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성경 대부분은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별히 고난가운데 치유와 회복의 역사 또한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어 고난을 그대로를 두실 때가 있습니다. 즉, 고난이 해결되지 않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고난을 어떻게 사용하시고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저는 던져야 했고, 저는 그 질문의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사도바울의 사건을 통해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정말 괴롭혔던 가시를 하나님께서 없애달라고, 정말 간절하게 3번이나 전심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사도바울은 특별히 제2의 예수님이라 할 정도로 질병 치유와 기적을 행했던 사도였으며, 하나님께 능력의 은사와 은총을 받은 특별한 자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3번이나 전심을 다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기저엔 이 가시가 제거되면 내가 하나님 복음 사역을 하는 데 있어 더 수월해질 테니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이 불편한 가시를 없애달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끔찍하게 괴롭혔던 그 가시를 없애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10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이 말씀 가운데서 수도 없이 불러댔던 찬양 가사인 약할 때 강함 되시네가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가시를 없애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난이 정말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또 연약함과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깨지고 부서질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그때야 말로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한 하나님이 우리의 강함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이 위대한 고백이 34년 만에 드디어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찾아온 어머니의 암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것 또한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족하다고 말이죠. 그리고 감히 알 수 없지만 이 상황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에게 발생한 이 고난이 더 이상 고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게 족하다는 것을요.
'나'라는 인간이 볼 수 있는 시야보다, 나의 지성의 이해보다, 나의 거창한 계획보다, 더 큰 것을 보시고 계획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일방적으로 끌려가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내가 가장 연약한 정점에 이를 때 그때야말로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서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께 기뻐한다.라고 고백할때, 감히 ‘나’라는 존재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요. 그렇다면 이 질병은 더 이상 질병이 아닙니다. 영광을 돌리는데 쓰이는 충만한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질병 가운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올려드림으로 인해 고난가운데에서도 내가 감히 기뻐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게 있는가 (나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
저는 질병적 고난 이외에도 다른 고난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질로 인한 궁핍한 고난,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와 괴로움, 끔찍한 전쟁, 기아, 기근, 자살,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일어나고 접할 수 있는 이 수많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런 고백이 가능한 일이긴 할까. 그게 말이 되는 것일까. 스스로 반문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크리스천은 천국소망이 있으니, 고난을 돌파하기 위해, 천국 소망을 붙잡고 이겨내야 하는 것일까? 천국에는 질병도 없으며, 내가 항상 평안하고, 행복만 가득해서, 천국의 삶이 너무 안락하기 때문에, 천국의 삶을 꿈꾸고 생각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접근법은 "지금 아프고 힘든데, 천국의 삶은 아프지 않기 때문에 지금 아프지 않다."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고난 가운데 분명 서있는데 고난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고, 분명 눈물이 나고 있는데 눈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물론 천국 소망을 품고, 현재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그 고난 가운데도 소망이 있음을 믿는다. 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으로 고난을 이겨낸다는 것에 있어서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난 자체도 필요한데, 고난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난을 부정하게 될까 봐 그 점이 우려스러웠습니다.
고난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천국 본향만 찾다가는 자칫 지금 내 앞에 또렷이 현존하는 고난이 현실과 동떨어져 고난 자체가 이원론적으로 되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고난 자체를 건너뛰어 고난이 주는 특별한 깨달음과 은밀한 계획을 내가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의 기저에는 고난 앞에 정면으로 맞서서, 고난이 선사하는 아픔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을 회피하고 싶은 이 마음조차도 결국 지독한 나의 이기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비빔밥이라고 할 때, 시금치는 맛없어서 빼고, 당근은 색깔이 맘에 안 든다고 빼버리면, 그것은 정말 비빔밥일까?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구나, 먹기 싫은 시금치와 당근도 넣고 비벼야 각각의 고유한 맛을 품고 있는 식재료들이 오묘하게 내 입안에 섞여 '비빔밥'이라는 하나의 완성된 맛을 내는 것이 진짜 비빔밥을 먹는 것이고, 인생도 그러했습니다. 고난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씨름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글귀인데, 태어나서 빛만 보고 산 사람은 빛을 알고 어둠을 모르는게 아니다. 그 사람은 빛도 모르고, 어둠도 모른다고 했던 말.. 그 말이 정말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을 두고 감히 하나님과 씨름하듯 묻고 또 물어야 진정으로 '고난'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그 방법 밖엔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저는 “고난을 알아야만 살 것 같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천적 소아마비를 가진 노진준 목사님이 호주 캔버라 설교영상을 통해 환난 중에도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납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선악과 사건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인간이 단순히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다고 우리를 이 땅에 두신게 아니었습니다. 자기 말을 어겼다고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거라면 너무 쪼잔한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단순한 접근은 단순한 답을 얻을 뿐 깊은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행위는 단순히 신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가 행복과 불행을 정의함으로써 불행의 서막을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선악을 먹은 행위는 신도 아닌 인간이, 즉, 완벽한 지혜와 지성을 갖추지 못한 인간이란 존재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사건입니다. 스스로가 '신'이 되어 만물의 원리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삶의 주인노릇을 하는 행위였습니다. 주인 됨은 어떤 뜻이냐면,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하여 우주의 원리를,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없이 스스로 증명해 나가고, 그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것입니다. 소름 끼치는 일인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모든 명제를 찾아야 하고 증명된 답을 내놔야 하며, 심지어 그 답을 알았다 셈 치더라도 그 답을 넘어서서 책임까지 져야 하는 존재로 나아가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책임은 정말 아무나 질 수 있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의 삶은 참 고달픕니다. 인간 나름대로 행복추구를 위해 열심히 물질을 추구하며, 무병장수를 목표하며 그것이 행복이라고 하며 너도 나도 열심히 그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진짜 본질을 덮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없으니까요. 진짜 내가 죽고 사는 본질적인 질문들은 외면하고 덮어두고 살아갑니다. 이런 삶에 있어서 인간의 삶의 주권은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삶의 왕노릇 하고 주인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선악과에 사건을 다시 묵상한 저는, 다시금 저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나의 삶이 언제부터 나의 것이었나. 나의 생명은 내가 만들었는가. 내가 나를 창조하였는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내가 진정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자유롭다는게 무엇일까. 나는 나를 정말 스스로 보장할 수 있는가? 나의 존재를 책임질 수 있는가? 내가 이 질문에 대해 하나하나 증명할 수 있는가? 저는 이 질문에 어느 것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나의 인생과 나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누나, 나의 가족들, 나의 소중한 집, 나의 일터, 나의 물질, 나의 옷, 나의 양식마저도 더 나아가 나의 생명까지도 정말로 '나의' 소유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나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 그분의 것이며, 그분이 통치하시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이제 서야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34년 만에 진정으로 나의 삶의 주인을 그때 불렀습니다. '주님'이라고요.
그분을 통해서만 나의 존재 근거가, 나의 삶의 목적이 완벽하게 답이 되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자칫 오해해서,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과연 있는 것인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도 인생가운데 당연히 존재하고, 그분께서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셔서 나만의 고유한 개성을 주셨고, 또 특별히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삶을 내가 인정하고 선물같이 주신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비록 고난과 평탄치 않은 인생일지라도 말이죠. 결론적으로 나의 인생의 주권을, 통치를, 내가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정하는 것이 비로소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마주하는 태도가 정상적으로 되었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 되어야 함을 알게 되고 난 다음, 특별히 고난이 주는 무게로 나의 자아를 압축할 때 짓눌려 그 즙으로, 인내를 넘어 연단되어 나아갈 때 나의 소유라며 외치고 떼쓰며, 나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이 지독하고 이기적인 나의 피가 흐를 때 그때야 말로 비로소 내가 죽고,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 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외쳤던 사도바울의 고백이, 진정 나의 고백이 되는 것이며
로마서 5장 3절~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했던 말씀의 산 증인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난에 대해 묵상했지만 그 끝엔 뜻밖에도 나의 지독한 이기심과 삶에서 왕 노릇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 기도 일부분을 오늘 이 시간 공유하고자 합니다.
“광대하시고, 위대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도 좋지만
그보다 더 은밀하게 나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나의 영의 아버지, 나의 주인이자 나의 아버지..
나와 깊고 속삭이듯이 따스하게 관계하시는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고백합니다.
나의 삶의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의 것, 나의 소유라 생각하며,
내가 주인 행세하며, 그것들을 다스리려 했으며, 간혹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의 것도 아니면서 나의 것인 것 마냥, 나의 것들 회복시켜 달라고 떼쓰며, 나의 것들 풍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했습니다.
아버지 나의 삶의 목적과 나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 위함임을 이 시간 깨닫게 합니다.
매일매일 나를 죽이며, 아버지를 높이게 하옵소서. 특별히 주어지는 축복 또한 나의 것이 아니며 아버지의 것이기에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특별히 고난가운데 영광을 보이실, 또 선하신 하나님이 이루실 선한 계획으로 사용하실 것을 믿으며 나아갈 때 슬픔 가운데 힘들지언정 하나님의 영광 받으심에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진정으로 나의 삶의 주인 되어 주세요.
진정으로 나의 모든 것 되시고, 나의 주인 되어 나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 드릴때 "제가 나의 삶의 주인 되어 주시 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마다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닌 제 마음으로부터 울리는 음성이 화답하여 들렸습니다.
"내가 그 기도를 기다렸단다" 라고 말이죠. 그 음성은 분명 내가 스스로 낸 음성이 아닌, 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입이 하나이고, 제 입은 계속 나의 삶의 주인되어 주시옵소서 라는 문장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의 입으로 2개의 문장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음성이 들리는 순간마다 따스함이 온몸을 감쌌고 저는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그때 잠시 내 마음에 오셨구나, 그리고 그분께서 이 기도를 34년 동안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화와 결단
이후의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변화 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세상은 그대로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실감하면서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대적하며 살 수 없구나 매일매일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 하면서 영적 싸움을 이겨나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 예전엔 읽지도 않았던 성경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을 어떤 과제나 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좋아서 정말로 내가 너무 행복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외하는 즐거움 무엇인지 맛보아서 저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그러지 말아야지, 성경에서 이건 하지말라고 해서 하지 않아야겠다. 라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과 깊게 인격적으로 매시간 매초 연결되고 싶다. 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지금도 계속해서 어머니와 저는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내가 믿기에, 당연한 것 하나 없는 선물같은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며 세상을 덮어버릴 만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기쁨’을 저에게 알게 해주신 그 은혜에 너무 감사드리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었는데 책 일부를 잠깐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단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만으로 만족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구속된 우리 인간을 자유케 하심을 넘어, 즉 하나님의 자녀 됨을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목적하는 수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수준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대등한 관계를 지닌 믿음으로 다져진 실력 있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대등한 관계는 자발성으로 하나님과 맺어지는 관계를 뜻합니다. 여기서 자발성이 성립하기 위해선 반드시 자유가 필요합니다. 즉, '나'라는 존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를 성립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습니다. 요약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특별히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대등한 관계까지 이르러 진정한 '사랑'과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추가로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사랑은 어느 한쪽이 열등하거나, 종속될 수가 없음을 뜻합니다. 만약 비대칭적인 관계에서의 사랑은 연민적 사랑에 가깝습니다.
즉, 하나님이 끝끝내 원하시는 것은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성립하고 내가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까지 되길 원하시며 또 그렇게 허락하셔서 나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시어 진정으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길 원하십니다. 맨 먼저 인간의 운명부터 설득하시고, 그다음으로 나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나의 이해까지 설득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나를 실력 있는 자로 양육하시고 키우시며 때로는 '고난'이라는 상급학교에 나를 진학시키셔서 강권적으로 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어디까지 나를 가르치시고 양육시키실까요? 결국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자리까지 나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저는 이 스토리가 너무나 놀랍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나에게 '자유'를 허락하시어 감히 내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대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우리 인간을 설계하셨는가.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후사를 운영하는 자로 유업을 받게 하시는가.입니다. '사랑'말고는 이 스토리를 설명할 수 없으며, 나라는 존재는 정말로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구나.라고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고난의 길을 걷더라도, 나를 키우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금 내 앞에 거대한 벽이 내 앞을 가리고 있어 어둠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면, 내가 이 벽을 부셔달라고 그분께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양육 안에서 내가 이 벽보다 높은 키로 자라나서 내 앞에 있는 벽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야겠다고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성장가운데 고난으로 인해 또 다시 무너질지라도,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의 인생을, 나의 존재를, 책임져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내가 믿기에 그 하나님을 믿고 선하신 하나님의 여정에 다시금 나의 인생을 맡기고자 합니다.
끝으로,
특별히 병마 가운데 투병 중이신,
저에게 신앙이라는 이 세상 최고의 유산을 물려주신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육신의 어머니이자 믿음의 동역자이고, 영의 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인생을 관통하여 저에게 오셨고 저를 친히 만나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합니다.
부족한 간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질병가운데 고통받고, 신음하시는 환우 및 가족분들을 위해 저 또한 부족하지만 기도하겠습니다. 고난가운데 하나님께서 한명 한명 깊은 위로를 해주시고, 그의 인생과 삶을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하심을 이루시고 또 우리가 고난가운데 낙망하고 절망만 하는 것이 아닌 이를 역전의 기회삼아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시고, 또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그런 고난이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정말 진심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